똑닥에는 네 명의 기획자가 있었다. 시니어2, 주니어2의 구성이었다.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가 한 개, 그 다음으로 중요한 업무가 하나, 그리고 각각의 중요도는 낮지만 진행이 필요한 다수의 업무가 있었다. 어떻게 업무를 나누는 것이 좋을까?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시니어 두 명에게 중요한 업무 하나씩을 맡기고 다른 업무들을 주니어가 맡으면서 시니어 두 명이 각각의 주니어 업무를 수퍼바이징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팀원들의 특성을 살핀 후에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판단을 내렸다.
1. 해랑
가장 중요한 유료멤버십 업무는 주니어 두 명 가운데 한 명이었던 해랑에게 맡겼다. 대략 3년 정도 경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첫 2년은 서비스를 만드는 기획자라고 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경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랑에게 똑닥의 운명을 가를 유료멤버십 업무를 맡긴 것은 프로젝트의 특성과 해랑의 성향이 잘 들어맞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유료멤버십은 최초 발의로부터 1년, 실제로 기획과 개발에 착수한 뒤로 10개월 정도가 걸리는 꽤 긴 프로젝트였다. 그 기간 동안 온전히 그 업무에만 집중할 사람이 필요했다. 시니어 두 명 중에 한 명은 서비스기획 팀장을 겸하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이제 막 육아휴직에서 복귀한 상태였다. 하나의 프로젝트에 완전히 집중하기 어려웠다.
외부에서 좋은 기획자를 데려오는 것은 처음부터 고려하지 않았다. 런웨이가 별로 남지 않은 당시의 똑닥의 상황에서는 빠른 시간에 적합한 기획자를 찾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고, 설령 찾는다 해도 내부 히스토리를 파악하고 조직에 융화될 시간이 부족했다. 있는 카드를 최대한 살려야 했다.
해랑은 개발자들이 굉장히 선호할 수 있는 타입의 기획자였다. 무엇보다 굉장히 꼼꼼했다. 가령 예외 케이스를 정리할 필요가 있을 때면 거의 모든 경우의 수에 대해서 모두 디테일하게 문서로 정리했다. 커뮤니케이션도 원활했고 책임감도 강했다. 다른 사람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고 자신이 들은 내용을 곰곰이 곱씹어보는 성격이었다. 성장하고 싶어했고, 무엇보다 지구력이 강했다. 굉장히 솔직하게 피드백을 주어도 그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았다. 당장의 실력은 부족한 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시간을 두고 계속해서 발전할 수 있는 타입이었다.
물론 해랑에게도 약점은 있었다. 큰 프로젝트를 맡았던 경험은 당연히 없었고, 상상력이 강한 타입은 아니었다. 프로젝트의 모든 디테일을 꼼꼼하게 살피다 보니 정작 가장 중요한 의사결정에 충분한 힘을 쏟지 못했다. 강약 조절이 부족했고, 무엇보다 멀티 플레이가 잘 되지 않았다.
따라서 해랑에게는 유료 멤버십 이외의 다른 업무를 일체 맡기지 않았다. 10개월 동안 오로지 유료 멤버십 한 가지에 집중하도록 했다. 가장 중요한 의사결정 위주로 점검을 했고, 어디에 집중하는 것이 좋은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계속해서 설명했다. 결정을 이미 내린 것을 단순히 수행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도록 충분한 이야기를 나눴다. 아무리 급해도, 아무리 시간이 걸려도 해랑이 자신이 하는 일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일단 이해하면 그 다음의 디테일은 해랑이 나보다 훨씬 더 꼼꼼하게 처리했기 때문이다.
2. 예빈
똑닥에는 '원격진료'라는 골치아픈 프로젝트가 하나 있었다. 당시만 해도 코로나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던 시기라서 원격진료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굉장히 높았고, 실제로 MAU나 앱 이용지수에도 크게 영향을 주었다.
원격진료는 단순히 앱 내에서 진료를 볼 수 있는 것 뿐 아니라 처방전, 약 수령, 모바일 결제를 포함한다. 하나 하나가 엄청나게 어려운 스펙은 아니었지만 그 연결이 굉장히 자연스러워야 했다. 그러나 다른 앱들과 달리 똑닥은 병원에서 의사와 간호사가 사용하는 프로그램인 ERM과 연동되는 서비스였고, EMR과의 협업 없이 똑닥에서 자체적으로 노력해서 유저가 만족할 만한 사용성(Flow)을 만들어내기는 어려웠다.
한 마디로 계륵같은 존재였다. 방치하고 있다가 한 번 더 코로나가 전국을 덮으면 완전히 주도권을 뺏길 수 있었다. 그러나 원격진료 프로세스를 제대로 잡는다고 해서 런웨이를 늘릴 수 있는 가능성은 없었다. 현재 한국의 의료법 상으로는 법을 저촉하지 않는 이상 원격진료로 영업이익을 낼 수 있는 방법이 전무했기 때문이었다. Impact은 불확실한데 굉장히 큰 리소스가 투여되어야 했다.
예빈은 굉장히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하고 싶은 프로젝트보다는 회사가 필요로 하는 프로젝트를 하고 싶어했다. 어떤 것을 하고 싶은지에 대한 프로젝트 선호도는 적은 반면, 책임감을 가지고 집중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맡고 싶어했다. 이 업무 깔짝, 저 업무 깔짝 하는 회사생활에 지쳐있었기 때문이었다.
해랑과 예빈은 서로 달랐다. 해랑이 좀더 회사 내부의 동료들과 잘 지내는 타입이었다고 한다면, 예빈은 회사 밖의 사람들하고도 잘 지낼 수 있는 타입이었다. 원격진료를 제대로 개선하기 위해서는 결제 솔루션부터 바꾸어야 했는데 토스(& 토스페이먼츠)와 같은 외부 파트너사와 협업하기에는 예빈이 더 맞았다.
또한 예빈은 '아무도 해보지 않은 업무'를 맡기기에 적합했다. 모르는 사람과 만나서 일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던 것처럼 처음 해보는 업무를 맨 땅에서 헤딩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해랑만큼 꼼꼼하진 않았지만, 그만큼 더 낙관적이었다. '어떻게든 해보면 되지 않겠어요?'와 같은 말을 많이 했다.
무엇보다 예빈은 엄청나게 오래 일했다. 자신이 가진 부족한 것들을 시간으로 만회하려는 듯 매우 오래, 매우 강한 강도로 일했다. 그렇게 일하는 것이 꼭 효과적이란 것은 아니다. 열심히 일하는 것보다 잘 하는 것이 훨씬 나을 때가 많다. 계속해서 파헤치는 것보다는 한 걸음 떨어져서 가만히 바라보는 것이 나을 때도 많다. 그러나 적절하게 개입할 수 있는 매니저가 있는 상태에서라면 계속해서 파고드는 성향은 업무를 배우는데 굉장한 도움이 된다. 이러한 예빈의 성향을 예빈을 잘 아는 누군가가 한 마디로 정의했다.
옛날 사람처럼 일한다.
3. 서은
서은은 이제 막 육아휴직에서 복귀한 상태였다. 다른 기획자와 달리 아직 서은의 성향을 완전히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업무를 나누기 전에 일단 서은과 이야기를 많이 했고, 서은이 실제로 업무를 하는 과정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서은의 강점은 아래와 같았다.
- 서비스 기획자로서 경험이 많다
- 똑닥의 히스토리를 많이 알고 있다
- 어린 자녀를 가지고 있다
- 개발자, 디자이너 등 다른 직군의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선다
- 멀티에 강하다
서은의 특성을 파악한 후 '1-2가지 프로젝트에 집중하는 것 보다는 다양한 업무를 최소한의 스펙으로 진행하는 것'으로 서은의 역할을 정했다. 이미 기획자 4 명 중 2명이 한 가지씩의 장기 프로젝트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는 동시다발적으로 업무를 쳐낼 수 있어야 했다.
시니어라고 꼭 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업무를 맡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동료들이 자신의 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주는 것 역시 필요하다. 슬램덩크에서 나오는 채치수의 각성과도 같다. 가장 빛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동료를 빛나게 하는 역할을 맡는 것 역시 시니어의 역할이다. 그것의 가치를 알아봐주는 매니저가 있다면 말이다.
서은에게 가장 강조한 것은 '납기와 최소스펙(Minimum Required Spec)'이었다.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을 전제로 최대한 빠르게 업무를 진행하도록 했다. 절대 욕심을 부리지 못하게 하고, 딱 필요한 만큼의 스펙을 정해진 시간 내에 진행하도록 했다. 해야할 사항은 최대한 정확하게 주었다. 생각하는 것보다는 '실행'에 초점을 두었다. 해야할 업무들이 많았고 빠르게 처리하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에 가장 효율적이라 생각하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서은은 특히 개발자에 다가서는 것에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혼자 끙끙 앓으며 고민하는 대신 그냥 서른 발자국을 걸어가서 개발자와 이야기를 했다. 디자이너와도 이야기하고, 세일즈와도 이야기를 하고, 마케터와도 이야기를 했다. 병원에서 벌어지는 상황도 잘 알고 있었고, 본인 자신이 엄마이기도 했다.
어떤 상황이 벌어지건 패닉에 빠지지 않았고, 문제가 있으면 사람들과 이야기했다.
4. 의진
의진은 서비스기획 팀장이었다. 네 명의 기획자 중에 가장 정통적인 기획자에 가까웠다. 경험도 많고, 똑닥에 합류한지도 오래 되어서 히스토리도 가장 많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팀장은 전체를 봐야 한다. 팀장이 하나의 업무에 온전히 몰입하면 어쩔 수 없이 팀 관리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팀장이 소홀해도 팀원이 일당백인 상황이라면 상관없다. 그러나 주니어 비율이 높은 상황에서라면 팀장이 메인 업무 하나를 가져가는 것보다는 팀원이 각자의 업무를 진행하며 미처 챙기지 못했던 부분들을 짚어주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다. 생각지 못한 이슈가 발생했을 때 펑크난 부분을 때우고, 그리고 서비스기획팀이 어떤 과제를 수행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논의하는데에 더 많은 시간을 쏟도록 했다.
팀장으로서 의진의 리더십이 특별히 강했던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의 마음을 살피는 것, 누가 어떤 일을 잘 하고 어떤 일을 못하는지를 판단하는 것,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그리는 것, 다른 부서의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 이러한 것에 대해서 의진은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의진이 필요했다.
'반짝반짝'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나는 어떤 일을 진행할 때 반드시 '기반'을 먼저 다지는 편이다. 꾸준한 것, 믿을 수 있는 것, 확실한 것을 먼저 구축한 후, 그 다음에 새로운 것을 찾는다. 축구로치면 공격보다는 수비다. 사람들을 열광하게 하는 것은 현란한 공격이지만, 승리를 가져오는 것은 수비에 있기 때문이다. 의진은 기반이 되는 존재였다.
다만, 의진에게는 실무를 병행하게 했다. 인원이 적은 스타트업에서 팀장이 실무를 뗀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기도 하지만, 의진이 일하는 모습을 다른 기획자들이 보는 것 자체가 굉장히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의진은 굉장히 꼼꼼하게 일했다. 가능한 것과 가능하지 않은 것 사이를 분명하게 구분했다. 의진이 OK한 건은 믿고 맡기면 되었고, 의진이 NO라고 한 건은 왜 그런지를 물어보고 스펙을 조정했다.
유료멤버십 런칭을 2-3달 정도 남긴 시점에 굉장히 급하게 처리할 프로젝트가 하나 생겼다. 병원에 제공되는 태블릿을 개편하는 업무였는데 한 번 접기로 결정했었으나 빠르게 다시 살리는 것이 필요했다. 무엇을 만들어야 할 것의 스펙은 정해져 있었으나 절대로 실수하지 않아야 했고, 무조건 납기를 지켜야 하는 업무였다.
나는 주저없이 의진에게 그 일을 맡겼다. 그러면서 한 마디를 더했다. 다른 팀원에게 일을 나누어주지 말고 의진이 혼자서 그 일을 하도록.
짧은 시간 집중하되 완성도를 타협할 수 없는 일. 그럴 때 가장 믿고 맡길 수 있는 것이 의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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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점만 있는 사람은 없다. '최고의 기획자는 무엇이 다른가?'를 생각할 필요도 없다. 모든 사람은 다르다. 서로 다른 강점과 약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모든 프로젝트도 다르고, 그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의 상황도 다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기억할 것은 하나다.
어떤 상황이건 간에, 그 상황에 맞는 각자의 역할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