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회사였던 LG전자에서는 5년의 시간을 보냈다. 내 생각보다는 훨씬 오래 다녔다. 중간중간 그만두고 싶었던 적은 많았지만 어떻게든 견디고 해결하려 노력하다 보면 그 다음 길이 보였다. 힘들다고 포기했다면 알 수 없었던 그런 값진 순간들이었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는 확실히 달라졌다. 나를 뽑아주었던 부장님이 퇴사하고, 첫 사수였던 과장님이 미국 법인으로 가면서 회사는 확실히 재미가 없어졌고, 그 뒤에 왔던 차장님과는 성향이 맞지 않아 한동안 굉장히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또 어찌어찌 차장님에게 맞추고 나니 업무는 다시 본 궤도로 돌아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는 없었다.
회사에서 왜 재미를 찾냐고 하면 할 말은 없다. 이것은 가치관에 대한 부분이라 설득이 쉽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보상을, 어떤 사람들은 승진을, 어떤 사람들을 워라밸을, 그리고 어떤 사람들을 재미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나라고 해서 보상이나 승진, 그리고 내 시간을 갖는 것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집중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을 때 즐거움을 느꼈고, 그렇게 집중하다보면 다른 것들은 저절로 채워졌다.
재미가 없다고 생각할 때마다 그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 보곤 했다. 원인을 찾고 내 사수나 매니저와 의논하기도 하고,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개선할 방법을 찾았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하나씩 쌓여가면서 회사는 확실히 재미가 없어졌다.
회사는 원래 그런거야. 너는 언제나 철이 들래?
같이 일하는 동료나 선배에게 의논을 하면 이런 말을듣곤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삶에 익숙해지고 싶지는 않았다. 일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 까지는 괜찮았지만, 그것을 당연하게 느끼게 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LG전자에 입사한 지도 4년이 훌쩍 넘은 때였다. 그만두어야 한다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상하리만큼 쉽게 그만둘 수가 없었다. 다른 회사로 간다는 것, 새로운 일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조금만 더 버티면 한 고비만 더 넘기면 새로운 장면이 열리지 않을까의 기대를 완전히 저버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와서 돌이켜 보면, 회사를 떠난다는 것은 '실패'라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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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괴롭게 했던 것은 크게 네 가지였다.
첫 번째, 연차가 늘어나고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졌는데도 내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일들은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었다. 이전에 비해 훨씬 적은 노력을 들여 훨씬 많은 일을 할 수 있었고, 일의 완성도도 이전에 비해 굉장히 높아졌다. 끝까지 파헤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내가 맡고 있었던 업무에 대해서는 사수나 부서장보다도 잘 했다. 하지만 그들은 내게 일을 맡기고 내가 알아서 진행할 수 있게 하기보다는 계속해서 나를 관리하려고 했다.
두 번째,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 같은 팀에서 다른 팀으로, 부장님이 아니라 상무나 부사장으로 시선을 넓혀도, 닮고 싶은 사람이 없었다. 자신의 관점을 가지고 생각을 이야기하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만나지 못했다면 모를까, 내게는 부장님과 과장님이라는 확실한 케이스가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공백은 굉장히 크게 다가왔다.
세 번째, 아무리 노력해도 국내에 있으면서 유럽 사람들보다 더 현지의 마케팅을 잘 한다는 것은 불가능해보였다. 본사에서 직접 유럽의 각 국가에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지시를 하는 것 보다는 오히려 각 국가 법인의 담당자들의 말을 귀기울여 듣고 그 사람들이 자신의 나라에 맡다고 판단하는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이라 느껴졌다. 그 사람이 더 그 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데 본사의 방침을 교육하고 있는 내가 한심해보였다.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누가 승진하는가'를 살펴보고 내게는 그러한 요소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당시의 LG전자는 '회사에 대한, 상사에 대한 로열티'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어도 따라야 했고, 그 이유를 물을 수 없었다. 아니 좀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그 이유를 물을 만큼 가깝지 않으면 그 이유를 들을 수가 없었다. 정보는 권력처럼 느껴졌다. 특히 '의전'에 있어서는 나는 낙제에 가까웠다. 왠만한 일은 스스로 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내가 모시는 상사나 그 상사의 상사, 그리고 같은 직급의 다른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비업무적인 요구사항들을 제대로 처리할 수가 없었다. 하기 싫었다기 보다는 애초에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해외 법인에 도착하면 그냥 택시를 타고 호텔로 가면 되는데 왜 법인에서 마중을 나와 있어야 하는가와 같은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것들이 계속해서 나를 괴롭혔다.
이러한 것들은 시간을 두고 개선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도 꽤 오랫동안 회사를 다녔다. 혹시라도 내가 잘못 판단했을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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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회사를 떠나게 된 것은 다소 어처구니 없는 계기를 맞이했기 때문이었다.
일을 굉장히 못하지만 그나마 밑의 애들이 자신의 일을 하게끔 놔두었던 부장님이 다른 부서로 가시고, 상무 진급을 앞둔 부장님이 부서장으로 왔다. 그 분은 의욕에 넘쳤고 부서의 모든 일을 샅샅이 이해하려고 했다. 하지만 실무를 직접 진행해보셨던 분은 아니었고, 그 분이 계속해서 업무를 파악하기만 하고 아무런 부가가치를 만들지 못하는 동안 일은 계속해서 지연되기만 했다. 나와 차장님은 어떻게든 최대한 맞춰드리려고 했지만, 모든 일에는 데드라인이 있는 법이다. 협렵업체가 영상물을 찍어야 했는데 촬영일 전날까지도 비용을 올린 결재를 승인해주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요? 촬영을 중단하도록 할까요?
부장님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다만 촬영을 중단한다면 전시회까지 일정을 맞출 수 없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분명하게 말했다. 부장님은 왜 미리미리 결재를 요청하지 않고 이렇게 시간에 촉박하게 올렸냐는 말을 했다. 그래서 나는 언제부터 차장님에게 승인을 받았고, 부장님에게 결재가 올라간 후에도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에 대해서 설명했다. 화를 꾹 참은 것도 아니고 그냥 담담하게 설명했다. 애초에 부장님에 대한 큰 기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부장님은 마지못해 '구두로' 승인했다. 왜 마지막까지 결재해주지 않는지는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것은 부장님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 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차장님은 그래도 이만하면 다행이란 말로 나를 위로했고, 나는 협렵업체에 전화를 걸어 다음 날 촬영을 예정대로 진행하도록 이야기를 했다. 장소섭외와 촬영팀, 모델들을 섭외한 후에 전전긍긍하고 있던 협렵업체 대표님도 다행이란 말을 했다. 오랫동안 나와 합을 맞추었던 회사이기도 했다. 촬영은 무사히 진행되었고 이제 대금지급을 해야 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부장님이 승인을 거절한 것이다.
아직도 부장님이 왜 그렇게 했는지를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예산을 줄이란 지시가 있었고, 전시회의 주요 참석자가 변동되면서 준비하던 전시회에 대한 중요성이 낮아졌고, 그래서 새로운 영상물을 제작하기 보다는 기존의 제작물로 재탕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는데, 그것은 우리 회사의 문제일 뿐이다. 협력업체는 이미 촬영을 진행했는데 우리 내부의 상황변화로 인해서 비용지급을 거절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이에 대한 부장님의 답은 명확했다. 본인은 결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내 안의 뭔가가 툭하고 끊어졌다.
'알겠습니다' 한 마디를 남기고 걸어나오다가 들고 있던 파일을 회사 통로에 던졌다. 평생 그런 행동을 한 적도 없었고, 사실 얇은 비닐파일에 종이가 두 장 정도 끼어있었던 상태였기 때문에 그렇게 큰 소리가 날 것이라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던진 각도가 좋았는지, 정말로 세게 던졌기 때문인지 몰라도 내가 던진 파일은 엄청난 소리를 내며 같은 층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을 깨웠다.
당장 돌아오지 못해!
부장님은 나를 다시 불러서 분이 풀릴 때까지 목소리를 높여 화를 냈다. 나는 더 이상 화가 나지도,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그냥 이렇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내게 화를 내는 부장님과 그 화를 듣고 있는 나, 그리고 옆에서 어쩔 줄 모르고 있던 차장님을 마치 제 3의 카메라가 보고 있는 것처럼 지켜보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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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마침내 첫 직장을 떠나기로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스스로 굉장히 좋은 결정이었다고 느끼는 또 하나의 결정을 내렸다. 바로 그만둔 것이 아니라 6개월 뒤, 아무도 더 이상 그 날의 사건을 기억하지 못할 때 그만두기로 한 것이다.
협력업체와는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잘 이야기를 해서 최소한의 실비를 보전해주었다. 돌이켜보면 부장님도 아예 비용을 승인하지 않으려는 마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예산을 줄일 필요가 있었고 내게 뭔가의 교훈을 주려고 했던 마음이었을 수도 있고, 비용을 좀더 깎아보려는 생각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처음 약속했던 금액은 아니었지만 그 일은 그럭저럭 마무리되었다.
내가 하던 업무들은 잘 정리해서 후임자가 쉽게 할 수 있도록 매뉴얼로 남겼다. 떠난다고 해서 '될 대로 되라지'라고 할 생각은 없었다. 맨 땅에서 부딪히며 알게된 내용들을 알기 쉽게 정리했다.
다음 회사는 어디로 갈 지도 찾아보고 지원해서 면접을 보고 다행히 합격을 했다. 지금까지 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업무를 해보고 싶었고, 되도록 우리나라에 관련된 일이었으면 했다. 하드웨어가 아닌 사업, 오프라인이 아닌 사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조금은 젊은 조직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회사의 규모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렇게 찾은 곳이 네이버였다. 당시에는 NHN이란 이름이어서 농협 관련된 회사인가 오해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차장님께 먼저 그만두겠다고 말을 했다. 차장님은 대충 눈치를 채고 있었다. 그 다음에는 부장님께 이야기하고 인사팀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퇴사일정을 정하고 남은 연차를 썼고, 마침내 첫 회사를 그만두었다. 나는 그냥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였기 때문에 나의 퇴사 소식은 그렇게 이슈거리도 아니었다. 조용한 퇴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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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를 떠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것으로 표현할 때가 많다. 마지막에 별 것 아닌 것으로 헤어지게 되는 경우가 있지만, 사실 그것 때문에 헤어지는 것은 아니다.
결국 떠나게 되었지만 첫 회사에서 보냈던 5년의 시간은 두고두고 이후의 직장생활을 하는데 든든한 기반이 되었다. 새로운 업무를 익히는 법, 회사 생활에 적응하는 법, 메일을 쓰는 법, 보고를 하는 법, 밤새워 회식을 하더라도 일단 9시까지 출근한 뒤에 연차를 내는 것과 같은 많은 것들을 배웠다.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특히 처음 입사했을 때의 부장님과 과장님은 나중에 돌이켜봐도 굉장히 일을 잘 하는 사람이었다.
첫 회사가 중요하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것은 거짓이 아니다. 아직 '회사'에 대한, '직장'에 대한, '일'에 대한 판단 기준이 없던 무방비같은 마음에 첫 회사는 그 기준을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첫 회사를 나와 드디어 나는 미련을 털어내고 나의 길을 갈 수 있었다.
앞으로 있을 많은 날들의 시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