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결정하면 뒤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결정하는 것까지는 오래 걸릴 수 있지만 일단 결정을 내리면 똑바로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선택은 되돌릴 수 없고 중요한 것은 앞으로 남은 시간들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람들을 보면 부러운 마음이 든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나는 내가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바둑에는 '복기'라는 것이 있다. 승패가 갈리고 나면 두 기사가 방금 끝낸 판을 다시 두면서 서로 의견을 나누는 과정이다. 그 판에서 가장 아쉬웠던 순간, 결정이 어려웠던 순간, 상대의 생각이 궁금했던 순간으로 돌아가 서로의 의견을 묻는다. 패배한 사람은 화도 나고 실망도 크겠지만 복기 과정을 생략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패배한 사람이 원하는 시간 만큼 충분히 복기를 한다.
어떻게 그렇게 과거의 일을 기억하고 계세요? 어딘가에 적어놓으시나요?
페북이나 링크드인 덧글, 그리고 뉴스레터 회신을 통해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종종 묻는 말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어떤 일이 종료되었을 때 어딘가에 따로 적어놓는 루틴은 내게 없다. 그냥 시간이 지나면 지나간 것을 돌아보면서 그 중에서 1) 다시 떠올릴 만큼 내게 영향을 주었던 사건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2) 그 건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할 뿐이다. 왜 그 사건에 대해서 생각이 머물렀는지, 왜 마음이 불편한지에 대해서 충분한 시간 동안 복기한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시간이 많이 흘러도 그러한 사건들을 계속 머리 속에서 꺼내본다. 정말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사건이 일어난 당시에는 평정심을 유지하기 어렵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날 때도 있고, 억울할 때도 있고, 패닉에 빠질 때도 있고, 도파민에 빠져 주위를 둘러보지 못할 때도 있고,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할 때도 많다. 그러나 그러한 흥분은 시간이 지나면 점차 가라앉는다. 흙탕물 가득한 물컵에서 벌어지는 일과 같다. 불순물들이 가라앉고 나면 그 위의 물은 투명해진다. 그리고 그제서야 어떤 것들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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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에 다니면서, 첫 직장이었던 LG전자에서 경험한 것들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다. 물론 모든 시간을 다시 돌아본 것은 아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내게 영향을 준 사건들에 대해서 생각을 했다. 상황을 이해하려 했고, 그 때 내가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더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과거는 이미 벌어진 것이고, 그 때의 나는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지만, 과거를 돌아보는 과정을 통해서 앞으로 내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앞으로 비슷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판단하고 결정하고 싶은가에 대해서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네이버를 나온 뒤에 네이버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생각했다. 페이스북을 다니면서, 카카오를 다니면서, 비브로스를 다니면서 필요한 순간 계속해서 꺼내봤다. 그 기억이 그 때의 기억으로 멈춰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떠난 후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네이버가 진행하던 사업들이 무엇이었고 어떤 결과를 낳게 되었는지를 시간이 날 때마다 계속해서 살펴보았다. 페이스북을 나온 뒤에는 페이스북이 추가되었고, 카카오를 나온 뒤에도, 비브로스를 나온 뒤에도 각각의 직장들이 복기 리스트에 추가되었다.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생각보다 괴로울 때가 많다. 내가 잘했던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흐릿해지고 내가 잘못 판단했던 것, 좀더 잘 할 수 있던 선택들이 점점 더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새벽에 깨어나 수년 전에 벌어졌던 일들을 생각하기도 한다. 마음이 불편했던 순간들, 좀더 잘 할 수 있었던 것들이 특히 그렇다. 돌아본 과거는 안타까움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더라도 과거를 돌아보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한 경험들이 쌓여 지금의 내가 되었고, 앞으로의 선택을 위해 충분히 곱씹어야 하는 소중한 단서들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에 같은 실수를 앞으로도 몇 번이나 더 할 것이란 것을 알지만, 어떤 부분들은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다는 것도 알지만, 어떻게든 내가 잘못 판단하는 것들의 패턴을 찾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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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꽤 힘들다. 그러나 앞으로의 시간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안에는 그 많은 시간을 거쳐 발견한, 아직까지 내게 남아있는 소중한 사람들이 있다. 힘들었던 순간을 같이 한, 서로의 단점을 꺼내놓고 애써 숨기려 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