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카오를 나와 스타트업에 합류하자마자 CEO 방부터 없앴다.
회사는 60명이 채 안되는 작지도, 크지도 않은 규모였는데 여의도에서도 가장 좋은 건물 중의 하나인 파크원타워에 있었다.
아니, 여기 임대료 비싸지 않아요?
물어보니 원래는 강남역 근처에 있었는데 코로나 시기에 여의도에 공실이 많이 나서 렌트프리 기간을 길게 얻어 다른 관계사들과 같이 좋은 조건으로 입주했다는 설명을 들었다. 근무지를 다시 옮기는 것은 꽤나 번거로운 일이었으니 일단 그 문제는 덮고 오피스를 둘러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던 것은 전용 회의실이 한 개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같은 층의 다른 회사들과 공용 회의실을 같이 쓰고 있었다. 창문이 없는 그냥 일반적인 회의실이었고, 회의실 규모도 작고, 스크린이 없는 곳도 많았다. 무엇보다 회사가 다르다보니 급하게 회의실을 잡아야 할 때 양해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저 방은 뭐에요?
그렇게 큰 공간은 아니었지만 오피스 안에 독립적인 공간이 하나 있었다. 물어보니 전임 CEO가 사용했던 방이라고 했다. 어차피 CEO가 주재하는 회의도 많고 투자사나 외부 파트너사도 자주 방문하곤 하니 전용 공간을 하나 마련한 것이다. 들어가서 살펴보니 꽤 아늑한 공간이었다. 무엇보다 창문이 있었고, 그 밖으로는 한강이 보였다. 그래서 그 방을 없애고,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전용 회의실로 사용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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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어차피 CEO가 회의를 자주 주재하니 CEO 전용 회의실을 만들고, 필요할 때는 다른 구성원도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
b.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전용 회의실로 만들고 CEO가 참여해야 하는 급한 일정이 있을 때는 양해를 구하고 그 공간을 사용하는 것
이 둘은 비슷해보이지만 완전히 다르다. '누군가의 공간을 사용하는 것'과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은 그 의미가 비슷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모든 가구를 전부 빼고 큰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벽에 붙어있는 스크린만 남겼다. 이제부턴 누구나 사용해도 된다고 공지를 했다.
그 방은 주로 아래와 같은 용도로 사용되었다.
1. 일주일에 한 번 있는 리더십 미팅
실장과 일부 팀장과 함께 월요일 오전에 한 시간짜리 미팅을 했다. 회사의 핵심과제를 설정한 뒤, 진행사항에 이상이 없는지를 확인하는 목적이었다.
2. 여러 사람이 참석해야 하는 미팅
개발, 기획, 디자인이 한 자리에 모여서 새로 출시될 서비스에 대한 킥오프 미팅을 진행하거나, 개발실 혹은 기획실 인원이 모여 리뷰를 진행했다. 전사 차원의 핵심과제를 선정하는 공간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7-8명 정도 이용하면 좋은 공간이었지만, 좁게 앉으면 15명까지도 들어갔다.
3. 외부 고객 미팅
투자사, 파트너사와 같은 외부 고객이 올 때는 인원수에 관계없이 이 방에서 진행했다.
4. 면접
회의실 문을 열면 한 면 가득 통유리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 너머로 파노라마처럼 한강이 작렬했다. 면접을 위해 오피스를 찾은 지원자에게 굉장히 좋은 인상을 줄 수 있었다. 좀더 극적인 효과를 주기 위해서 무리를 해서라도 전동 블라인드를 달고 싶었지만 그것은 다음으로 미뤘다.
딱히 전용 회의실 용도를 정해 놓은 것은 아니었다. 위 네 가지 말고도 원하는 사람은 자유롭게 부킹하되, 급한 미팅이 생기면 서로에게 양보했다.
어떤 것들은 경험해 봐야 그 필요성을 알 수 있다. 전용 회의실이 없던 시절에 딱히 불편을 느끼지 못했던 사람들도 변화의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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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들 사이에 앉았다. 개발자들이 모여있는 공간이었고,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통로자리였다. 사람들의 얼굴을 익히고, 내게 상의할 것이 있으면 누구나 쉽게 찾아올 수 있는 그런 자리였다.
생각할 공간이 필요하면 한강으로 나가 걸었다. |